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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상인-천년을 이어온 자린고비 경영철학 , 홍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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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상인 - 천년을 이어온 자린고비 경영철학
국내도서
저자 : 홍하상
출판 : 국일미디어 200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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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7~58,

........에이스침대의 최근 행보를 살펴보면, 이를 더 뚜렷이 알 수 있다. 안성호 대표는 어쩌면 상인정신을 배우기 이전에 장인정신을 먼저 습득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그가 추구하는 에이스침대의 '최고 품질화'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 최고 품질화에는 개성상인들 특유의 상술도 포함되어 있다. 품질경영 중시라는, 어쩌면 다소 일반적으로 보이는 경여이념도 이러한 배경을 알고 난 뒤에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념이다. 즉 품질경영 중시라는 말에는 장인정신과 상인정신이 접목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안 대표의 노력은 남다르다. 그는 자신이 직접 각종 가구박람회에 참여하면서 색상과 소재의 변화를 일일이 체크한다. 또 가구 선진국인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에서 최신 가구 정보를 수집하는가 하면, 소비자 정보를 수집하고, 색채 전문 교수의 감수를 받아 인간 중심의 색상 연출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가 최종적으로 시도하는 것은 침대를 단순히 잠자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 연출을 할 수 있는 문화가치 상품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가 에이스침대의 대표로 취임한 이후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입니다'라는 브랜드 이미지 카피 대신 '침대를 바꾸면 아침이 달라집니다'로 바꾼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p68~69,

............허영선 회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삼립식품은 예전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없었다. 이에 허영선 회장은 사업다각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사업다각화는 아버지의 그것과는 달랐다. 즉 아버지 허 회장이 식품업 내에서 사업을 다각화했다면 허영선은 업종 자체를 다각화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90년대 중반 허영선이 진출한 리조트 개발 사업이다. 그러나 의욕적으로 리조트 개발에 진출한 그에게1997년 IMF 한파가 불어 닥친다. 결국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삼립식품은 부도를 맞고 만다.


허영선의 안타까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어버지가 자신을 믿고 맡겨준 삼립식품이 자신의 대에서 부도가 났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그는 기업의 생사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 경영권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삼립이라는 상호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삼립에는 아버지의 땀과 눈물과 혼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삼립이라는 상호를 유지하면서 회사를 인수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동생 허영인이었다.


허영인은 20여 년 전, 형에게 후계자 자리를 내어주고 샤니로 독립해 나갔었다. 그는 형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동생 허영인은 삼립이라는 상호를 지키면서 회사를 인수할 수 있는 최상의 적임자였다. 형 허영선은 자신의 회장 자리를 아우인 허영인에게 내어준다. 허영인은 법정관리에 들어간 삼립식품을 인수했다.


그는 이미 20여 년 전 성남 작은 공장 샤니를 운영하던 소기업주가 아니었다. 20여 년 동안 그는 (주)샤니를 성공적으로 키웠고, 파리바게트로 잘 알려진 파리크라상과 아이스크림을 평정하고 있는 배스킨라빈스, 즉 BR코리아를 가지고 있는 중견 사업가였다. 당시 그의 연 매출은 5,000억 원대로 태인샤니그룹의 총수였다.


동생 허영인은 아버지가 오직 한 길을 파왔던 것처럼 그 자신도 식품 사업에만 역량을 집중했고, 거기에 전력 투구했다. 초기에 그는 후계자 자리를 형에게 양보했으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상술과 정신 면에서는 후계자 못지않았던 셈이다. 아버지와 형이 이끌던 삼립이 위기에 빠지고 형이 회사의 인수를 요청하자 그는 결국 삼립식품을 인수한다.




p84~85,

................개성의 상방에서는 점원들에게 철저하게 상도를 가르쳤으며 하늘이 두 쪽 나도 신용을 지키도록 가르쳤다. 또한 점원 개개인에게는 '절용', '절금'이라는 철학을 가지게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근검 절약이다. 점원들은 개성 상방에 있는 동안 안 쓰는 것을 버는 것으로 알고 살았다. 남한에서는 안성상인들을 이른바 '돌방망이'라고 하여 구두쇠 중의 구두쇠로 치고 있지만, 그 안성상인들보다 한 술 더 뜨는 것이 바로 개성상인들이었다. 


물건을 팔 때에도 절대로 필요 이상의 큰 이익을 남기지 못하도록 했다. 때로 손해가 나도 손해보다는 신용을 더 중시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개성상인들은 위험한 거래에는 절대 나서지 않았다.




p105~106,

.............허채경 회장이라면 한국 시멘트 산업의 개척자로 불린다.  5. 16쿠데타(원글은 혁명 ㅡㅡ;;;) 이후 박정희 정부에 의해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자, 그는 1961년 한일시멘트를 설립한다. 그리고 훗날 연간 700만 톤 규모의 시멘트를 생산할 수 있는 시멘트 공장을 만들면서 양회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또한 허채경 회장은 1970년대 국내 최초로 인도네시아에 철강회사를 설립하는 등 국내 철강계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한다. 그 이후에는 산지 개발에 뛰어들어 해발 800미터가 넘는 대관령에 낙농목장을 조성하여 우리나라 낙농 업계의 산파역을 해내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또 한번 변신하여 국제적 규모의 서울랜드를 건설하면서 관광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녹십자제약을 세워 제약 업계의 대표적 기업인이 되었는가 하면, 이처럼 많은 기업을 만들고도 내실 위주의 건실한 경영으로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허채경의 일생은 기업을 세우고 그것을 확장해 나가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의 일생은 사람을 모아 기업을 일으키는 것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가 오늘날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그보다 더 내실 있고 인화에 충실한 기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 걸음을 내디뎌도 소걸음처럼 튼실하고 여유 있는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p112~113,

...........이러한 우보경영 중의 하나가 바로 구성원들의 인화 단결이다. 내실을 다지는 데 있어서 구성원의 단결과 협동심,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신뢰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개성상인인 해성그룹의 고 단사천 회장도 일찍이 기업을 구성하는 요소는 사람 이외에도 자본과 설비 등 많은 것이 있지만, 이 가운데에서도 사람이 가장 으뜸이라는 뜻을 밝힌 바 있다. 허채경 회장의 생각도 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글 무식'이 아니라 '인 무식'이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글 무식이란 일종의 지식이 없다는 것으로, 좁게는 전문 분야에 대한 지식을 뜻하고 넓게는 기업 정보 인프라 혹은 상술과 경영이론까지도 포함된다. 결국 그는 그 모든 것보다 사람에 대한 이해와 신뢰의 부족, 그리고 인간애가 부족한 것이 더 두렵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의 인간 존중의 마인드가 오늘날 한일시멘트를 내실 있는 기업, 경영인과 종업원이 신뢰를 이루는 기업으로 손꼽히게 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인간 존중의 마인드를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하나있다. 1986년 한일시멘트가 서울 역삼동 일대에 18층 사옥을 지을 때였다. 당시 많은 외부 사람들은 그 빌딩 이름이 '한일시멘트 빌딩'이 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이 기업의 홍보 차원에서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허채경 회장은 그 빌딩 이름을 '우덕빌딩'이라 지었다.


우덕은 허채경 회장의 호이다. 이 호는 단양 공장이 위치해 있는 충북 단양 우덕리에서 따온 것이다. 이 단양 공장은 오늘날 한일 시멘트의 모태라 할 수 있다. 과거 허채경 회장은 석회지대를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고 단양군 객산 일대에서 석회석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단양 공장을 세우고, 그 감격에 아예 호까지 우덕으로 지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빌딩 이름에 의아해했다. 물론 우덕이 허채경 회장의 호이기는 하지만 기업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직접적인 홍보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고, 그 물음에 허채경 회장은 이렇게 답했다 한다.


"이 사람아, 이 건물이 우리만 쓸 건물이 아니지 않은가. 그 사람들 생각도 해줘야지."


여기서 그 사람들이란 빌딩에 입주할 다른 기업들을 말한다. 즉 입주할 다른 기업들도 다 자신들의 브랜드가 있을 터인데, 한일시멘트 빌딩이라고 해서 그 명칭을 '한일'이라고 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인간에 대한 배려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듯 인간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내실경영 덕분에 오늘날 한일시멘트는 금융계에서 '재계의 숨은 진주' 중 하나로 꼽힌다. 1996년을 기준으로 하면 회사 자본금 대비 부채비율이 121%이고, 이자 등 금융비용 부담도 매출의 5% 정도로 국내 기업 중에서는 최저 수준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재무구조가 탄탄한 것이다.



p120~121,

..........그는 개성상인의 후예답게 기업 경영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1954년에는 해성산업을 세웠고, 1958년에는 한국제지, 1977년에는 계양전기, 그리고 1993년에는 한국팩키지 등을 창업했다. 오늘날 해성그룹의 모태들이다. 특히 한국제지와 계양전기는 세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기업들이다. 


한국제지는 한국 제지 업계의 선구자적인 기업들이다. 우표 용지와 승차권 용지를 처음 개발하였고, '쳔년의 종이'라 불리는 중성지 제조 기술도 국내 최초로 개발하였다. 중성지란 젖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종이를 말한다. 


한편 계양전기 역시 1970년대 불모지였던 전동공구 산업을 개척한 선구자적인 기업이다. 현재 이 기업은 자동차용 D.C모터와 엔진을 생산, 판매하는 전문 업체로서 성장하고 있다. 


그는 상술에서도 특히 이재술에 능했다. 그가 사채업이나 주식, 그리고 기업 경영에 있어서 모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이재술 때문이다. 이재술이란 쉽게 말해 재물을 모으고 관리하고 적시에 투자하는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개성상인들은 이재술에 능했다. 이재술에 능했기 때문에 셈이 빠르고, 돈의 흐름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p121~122,

현금왕 단사천. 그는 닉네임답게 돈이 많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활은 검소 그 자체였다. 평생 점퍼 하나로 일관했고, 밥을 먹을 때는 반찬을 세 가지 이상 놓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근검 절약했던 것이다. 


옛날부터 개성상인들은 절제와 절약을 상도의 기본으로 삼았다. 상인이라면 당연히 검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개성상인 특유의 보수적 경영으로도 유명하다. 개성상인들은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 단사천도 그러했다. 보통 상인의 경우 1,000만 원을 벌면 남의 돈을 끌어들여 5,000만 원짜리 사업을 벌인다. 하지만 단사천은 1,000만 원을 벌면 500만 원을 저축하고 남은 500만 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당연히 사업의 규모는 커지지 않는다.


하지만 빚이 한 푼도 없는 만큼 내실이 있다. 남의 돈을 끌어 쓴 적이 없으니 웬만한 세파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 것이다. 개성상인들이 돋보였던 것은 IMF 때였다. IMF 한파로 현금 부족에 빠진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막 쓰러져갈 때 개성상인들이 경영하는 회사들은 그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시기에 오히려 더 약진했다. 부채가 거의 없어 이자가 나갈 일이 없으므로 이익금을 기술 개발이나 신제품 개발에 투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금을 쥐고 사업하라"는 말은 개성상인들의 철칙이다. 단사천 회장도 타계하기 직전 후계자들에게 자기 돈으로 사업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유훈에도 개성상인정신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현금을 쥐고 있으면 자연히 빚을 낼 일이 없다. 오늘날 개성상인들은 남의 빚이 없기로 유명한 사람들이다. 이른바 무차입 경영이다. 단사천 회장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는 평생 남의 돈을 빌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p185~186,

........한국 개성상인의 후예들 중에는 이재술이 남다른 세 사람이 있다. 현금왕 단사천 회장, 광화문 백할머니라 불리는 백희엽 여사, 그리고 광화문 곰이라 불리는 고성일이 그들이다. 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일단 그들은 모두가 개성의 실향민 출신으로 맨손으로 시작해서, 장사를 통해 목돈을 마련한 후 큰돈을 벌어들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사천 회장은 미싱 조립회사를 통해 부를 축적했고, 백희엽 여사는 페니실린, 마이신, 군복, 종이 등의 장사를 했고, 이때 번 돈으로 1960년대 말 주식투자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광화문 곰 고성일은 염료 장사를 통해 큰돈을 벌었다.


세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주식시장을 좌지우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주식시장에서 이름만 대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위 '큰손'들이었다.


한편 그들의 차이점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장사를 통해 목돈으로 발휘하기 시작한 이재술의 영역이 다르다는 것이다.


단사천 회장의 이재술 영역은 사채업이었다. 그는 1950~1960년대 지하경제를 주름잡는 큰손으로 통했고, 당시 재벌들도 그에게 돈을 빌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백희엽 여사의 이재술 영역은 주식이었다. 그녀는 일찍이 1960년대 말부터 꾸준히 주식투자를 해왔고, 그 안에서 대모의 위치에 군림했다. 그녀 역시 사채업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그녀의 이재술이 가장 잘 발휘된 영역은 주식투자였다.


반면, 고성일의 이재술 영역은 땅이었다. 그는 일찍이 서울이 발전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서울 외곽과 경기도 일대의 땅들을 사 모았고, 이 땅으로 7,000억 원대라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들의 또 다른 차이점은 주식과 관련되어 있다. 백희엽 여사는 주식시장의 대모답게 주식에서 실패해 본 경험이 거의 없다. 그녀는 주식시장에서 전설을 만들어낼 만큼 주식에 관한 한 절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단사천 회장도 주식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는 실질적인 이익보다는 주식의 도를 아는 거물급 스승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말하자면 돈보다는 이름이 높았던 것이다. 그가 주식시장에서 큰돈을 얻지 않은 것은 그가 사채업 이후에 개성상인정신을 좇아 기업가로서 더 왕성한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전기나 계양전기 등의 해성그룹이 바로 그것이다. 




p196~197,

............태평양화확과 더불어 국내 화장품 업계의 쌍두마차 격인 한국화장품의 창업주 임광정 회장도 개성상인이다.


임광정 회장은 1919년 생으로 서성환 회장보다 다섯 살이 많다. 그는 일제시대 때 개성공립상업학교를 나왔다. 그 역시 이후 북한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서자 남하했다.


임광정 회장은 서성환 회장과는 달리 월급쟁이로 시작했지만, 이후 1961년에 한국화장품공업(주)를 세워 대표이사가 됐다. 오늘날 한국화장품의 모태이다.


월급쟁이였던 그는 당시 자본이 넉넉지 못했으므로 작고한 김남용 명예회장이 사업자금을 댔다. 김남용 회장은 충북 증평 출신의 갑부였다. 이후 한국화장품은 태평양화학 못지않게 탄탄대로를 걸었다.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인 랑콤, 로레알 등과 기술 제휴를 맺고 쥬단학 베라겐, 쥬단학 마메론, 맨담 G, 맨담 바사쓰 화장품 등을 판매하여 성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말년에 두 개성상인의 운명은 달라진다. 서성환 회장은 스스로 퇴임을 결정한 반면, 임광정 회장은 타의에 의해 퇴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주위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바로 집안 문제였다.


서 회장은 사업뿐만 아니라 집안 문제에 있어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때문에 그는 후계자 문제를 잡음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임 회장은 사업자금을 대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돈관계까지 되었던 김남용 명예회장과의 불화로 1988년 경영권을 임충헌 대표이사에게 넘겨야 했다는 것이 주위의 평이다.


이 때문인지 서경배 사장이 이끄는 태평양화학은 여전히 업계 1위를 고수하며 승승장구하는 반면, 한국화장품은 업계 2위에서 5위로 전락하는 파란을 겪기도 했다.


개성상인들은 예부터 효의와 자양이라 하여, 집안 화목의 중요성을 일종의 상도로 강조해 왔다. 그것은 집안 문제가 곧 사업 문제로 비화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272~274,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가장 먼저 조선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민족자본과 상인정신을 말살시키는 정책을 암암리에 펴 나갔다. 조선회사령 공포, 시장규칙의 제정, 유기전 폐쇄, 개성인삼의 자유판매 금지와 토지조사사업 등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회사령은 한마디로 말해, 한반도를 일본의 원료 생산지와 상품시장으로 육성한다는 고전적인 식민지 이론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법령은 1910년 12월 29일 공포되어 1911년 1월 1일부터 발효되었고, 1920년 3월 31일까지 실시되엇다. 이 법령은 전문 20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반도에서의 회사 설립시 조선총독부의 설립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조선총독부가 사업을 정지, 금지시키고, 회사를 해산시키거나 폐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한국의 산업 발전이었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한반도 개발정책에 따라 한국 내의 모든 산업시설을 근대화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 조선 민족자본의 발전을 억제하고 한반도의 경제를 일제의 경제질서에 재편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 법령이 실시된 후 상황을 살펴보면, 회사 설치 신청이 686건 중 허가가 556건이었고, 조선 외 회사의 조선 내 지점 설치 신청은 91건 중 허가가 85건이었다. 또한 조선 외 회사의 조선 내 본점 설치 신청은 11건 중 허가가 11건이었다. 또 기존 회사에 대한 해산 명령은 7건이었고, 지점 폐쇄 명령은 1건이었다.


이 수치만으로는 법령의 비합리성이 보이지 않는다. 표면상으로는 회사 설립이나 경제 활동이 어려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허가 과정에서 총독정치에 대한 충성도, 재력과 신용도, 수익성 등에 대해 광범위한 조사와 더불어 헌병 경찰에 의한 간섭과 탄압이 이루어져 실질적으로는 일본인과 친일파만이 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또 애초에 그런 회사만이 허가 신청을 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게다가 대부분 허가 신청을 받아 설립된 회사들은 금융업과 상업회사였고, 제조업 등의 산업은 뒤처져 경제 불균형 현상이 일어났다. 결국 조선은 일제의 상품시장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소수민족 자본이 형성되지 않아 한반도의 경제력은 일본 자본에 장악되었다.


시장규칙은 1914년에 제정된 칙령이다. 이 규칙은 상인들의 실제 상행위가 이루어지는 시장을 일제의 목적과 질서에 부합되게 재편하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칙령에 따라 당시 시장은 제1호 시장부터 제4호 시장까지 네 가지로 구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