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ㅇㅇ
p32~33,
............그날도 나는 도구상자를 상대로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보통때 같았으면 짝꿍이 '내가 갖다줄게'라며 필요한 것을 가져다 주었겠지만 바로 며칠 전 선생님께서 주의를 주지 않으셨던가. 모두들 내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알았지만 거들어 주지 않았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나를 뒤로 한 채 수업은 시작되었다.
"흑흑, 흑흑"
나는 결국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학교에서 흘린 최초의 눈물이었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시작할 수 없다는 분함보다는, 혼자 남았다는 슬픔이 훨씬 더 컸다. 당황한 선생님께서 쏜살같이 달려오셨다.
"잘했어, 너 혼자 이렇게까지 해냈잖니?"
따뜻한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마침내 '으앙'하며 봇물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은 생각하셨다. 이 아이는 아무리 힘든 일을 시켜도 저항감을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다른 아이들과 구별된다든지,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오토 때문에 나머지 애들 전부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도와주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한 것은 아니다.
고민 끝에 선생님이 내린 결론은 사물함을 두 개 쓰도록 하는 것이었다. 도구가 든 상자와 산수세트를 각각 다른 사물함에 넣어 두고 뚜껑을 열어 둔다. 그러면 뚜껑을 여닫을 필요 없이 아주 쉽게 학습 도구를 꺼낼 수 있으니 그만큼 시간이 단축되었다.
이런 식으로 선생님은 언제나 내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p47,
'앗, 이 정글짐이 나한테는 정말 꼭 맞는 철봉이 되잖아!'
시험삼아 겨드랑이 밑으로 끼워 본다. 끙! 하고 힘을 주니 내 몸이 쑤욱 올라갔다. 저쪽을 보니 친구들이 철봉에 매달려 몸을 앞뒤로 크게 흔들고 있다. 나도 땅바닥을 차고 몸을 앞으로 내밀어 본다. 그러자 내 몸이 기세 좋게 앞으로 쑤욱 나가더니 반동으로 다시 뒤쪽으로 밀려간다. 야! 나도 철봉을 할 수 있다.
p198~201,
2월 20일. 드디어 입학시험이 시작되었다. 5학부에 지원한 나는 이제부터 닷새 동안 연속적으로 시험을 치러야 한다. 시험은 거의 하루 종일 걸리기 때문에 상당한 체력을 요구했다. 체력 면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뒤질 수밖에 없던 나는 꿈에도 원하던 와세다 대학 입학을 위해 거의 정신력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첫날에는 교육학부 시험. 내가 가장 자신있던 국사의 배점이 다섯 과목 중에서 가장 높았기 때문에 국사 시험만 잘 보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해프닝이 벌어진다. 둘째 시간이 되자 갑자기 소변이 마려운 것이다. 예상보다 추운 날씨와 긴장감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참아본다. 보통사람이라면 시험이 끝난 다음 화장실에 다녀오면 되지만, 난 혼자서 화장실을 이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간신히 참아 가면서 셋째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 나중에는 온몸을 비비 꼬아야 했다. 게다가 이번 시험과목은 국어. 암기하고 있던 내용을 시험지에 옮겨 쓰면 되는 국사 시험과는 달리 독해력과 사고력이 필요한 시험이다. 그런데 내 머리는 온통 화장실 생각뿐으로 필자가 뭘 주장하는지 파악할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끝났다. 1년간 열심히 해온 공부. 그 모든 것이 결국 '오줌'에 지고 말았다.
3월 1일. 합격자 발표 첫날. 이 날은 '문제의' 교육학부와, 최대의 난관이라고 알려진 정경학부. 두 군데 모두 가능성이 낮았다. 며칠 전에 몇몇 학원에서 나눠 준 모범답안을 보고 채점을 해보니, 커트라인에 닿을락말락 했다. 혹시........ 기대를 가져 봤지만, 집에서는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제대로 시험을 치르지 못했던 교육학부와, 사립대학교 문과계열 학부 중에서 최대의 난관이라고 일컬어지는 정경학부가 아니던가.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속으로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기에 마음이 부풀어 있었지만 부모님은 달랐다. 합격여부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고 어떻게 하면 풀이 죽어 있을 나를 상처받지 않도록 위로해 줄까 고민하고 계셨기 때문에 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더구나 아침 TV에서 방송해 준 '별자리로 본 오늘의 운세'가 불안해하는 부모님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오늘의 내 별자리(양자리) 운세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할 운세.' 평소 별자리 따위는 믿지 않던 부모님이셨지만 그날만큼은 완전히 포기하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주룩주룩 빗발이 거셌다. 눈물의 비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발표장으로 갔다. 5분도 안되는 거리. 별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도착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 때도 어머니께서 다녀오셨기 때문에, '합격자 발표'를 직접 체험하기는 처음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것처럼 인파를 헤치고 게시판 앞으로 나아가..... 이런 식의 광경을 상상했던 나는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헤쳐나갈 만큼의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미 다른 대학 몇 군데에 합격한 사람들에게는 쏟아지는 빗속을 아침 일찍 찾아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녀석들하고 난 근본적으로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달라!' 터무니없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선 정경학부의 게시판으로 향했다.
'4664, 4664, 4664...........'
수험번호를 입 속으로 되뇌어 가면서 게시판을 죽 훑어 본다. 어, 어라, 이상한데. 몇 번씩이나 확인해도 틀림없다. 무슨 까닭인지 게시판에는 4664라는 네 자리 숫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혹시 내 번호가 6446이었나? 의아한 마음으로 수험표를 끄집어내 다시 확인하지만, 수험표에는 분명히 4664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합격한 것이다. 와세다 대학에, 바로 내가!!
믿을 수 없었다. 꿈만 같았다. 설마 합격하리라고는, 게다가 지원한 모든 학부에. 어떻게 해서라도 와세다 대학에 가고 싶다는 일념뿐이었다. 거기서 무얼 공부할까에 대해선 생각도 해보지 않았고, 학과 선택에 고민을 해야 할 만큼 많은 학부에 합격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 내가 학과 선택 문제로 사치스러운 고민을 했다.
1개월 뒤의 입학식. 나는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정치학과의 신입생 자리에 서 있었다.
p218,
..........장애인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반면에, 장애인이기 때문에 해낼 수 있는 일도 있다. 예를 들어, 정치가나 관료가 '장애인을 위해 복지정책이 필요합니다!'라고 외치는 것보다 내가 계단 앞에 서서 '우리에게는 이 계단 한 칸이 그 무엇보다도 높은 벽입니다!'라고 호소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아주 사소한 예에 불과하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이 세상에는 반드시 존재한다. 나는 바로 그 일을 위해 이런 몸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읽은 책 복기 > 자기계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낌 좋은 사람들의 99가지 공통점-사이토 시케타 (0) | 2017.12.19 |
---|---|
천재가 된 제롬-에란 카츠 (0) | 2017.12.19 |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오히라 미쓰요 (0) | 2017.12.19 |
피크앤드밸리-스펜서존슨 (0) | 2017.12.19 |
명심보감 -황병국 (0) | 2017.12.18 |